▲ 글·사진 / 안병권 이야기농업연구소 소장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현장’에 주목하고 ‘현재’를 사생했던 사람이 있었다.

당시 조선의 시대사상은 유교였고 양반과 사대부중심의 세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적 인간상이 아닌 노동하는 인간들을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그려 풍속화의 시대를 연 사람.

이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이자 혁명이었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보다 한 세기 먼저 민중들의 삶을 들여다 본 사람이다.

▲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과 '짚신 삼기'

공재 윤두서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천시했던 다양한 분야와 인간에 대한 공재의 애정은 기존의 관념과 사고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을 형성하게 했다.

▲ 전남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공재 윤두서의 집, 채마밭에 겨울배추가 보인다

조선 숙종임금 시절 1713년 어느 추운 겨울날, 당시 정치 경제적으로 쇠락해가던 남인의 대표주자로 세상의 명리를 쫓는 삶에 염증을 느낀 공재, 고향 해남으로 낙향해 글쓰기와 그림으로 실학의 기초를 닦고 있었다. 현산면 백포리 별장으로 쓰던 그 마당 한 켠 채마밭에 한겨울을 오롯이 견뎌낸 겨울배추가 한창이다. 매서운 겨울추위 아랑곳 않고 꼿꼿하고 푸르다.

▲ 해남 겨울배추 노란속대쌈과 추대가 올라온 배추

“아버님! 진지 드세요” 아들 윤덕희와 며느리가 점심상을 내온다.
“아버님! 오늘은 배추 쌈이 좋습니다. 어머님이 작년에 담가두신 막된장에 쌈을 싸서 드세요. 지난 초겨울 김장 담그고 밭에 무심코 남겨둔 배추가 겨울을 넘어 왔네요. 어떤 녀석은 씨를 생산하기 위해 추대까지 올라 왔구요. 이 엄동설한 한겨울에도 이렇게 푸르고 싱싱한 푸성귀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야물고 단단해 아삭아삭 입안 씹히는 맛이 한겨울 별미이옵니다.”

윤두서는 그 긴 수염자락을 옆으로 쓱 넘기고 노란 배추 속대를 한 큰 쌈 말아 쥐고 입에 넣는다.

“그래! 맛있구나… 그런데 한 입 무니 볼따구가 볼룩거려 보기 흉하구나”지난해 자화상 그릴 때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던 백동경(거울)을 힐끗거린다.“껄껄껄! 체면이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이 맛을 즐겨야겠구나! 며늘아가야~ 동동주도 한 잔 가져 오너라”

▲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썼던 백동경(거울)과 채과도(菜果圖)

빛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던 동양의 미술시대에 명암법이 반영된 근대적 사생법으로 근대 서양의 정물화 개념을 미리 구현한 ‘채과도(菜果圖)’를 그린 윤두서는 한겨울 해남배추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보리라 마음먹는다.

공재 윤두서의 외증손자 다산 정약용

윤두서의 아들 낙서 윤덕희(조선시대의 대표적 풍속화가로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공재가 세상을 뜨고 난 후 13년 뒤인 1728년, 예쁜 딸을 낳는다. 그 딸이 해남 윤씨로 정재원과 혼인하여 1762년(영조 38년), 남양주 조안에서 셋째 아들 약용을 낳고, 약용이 9살 되던 해 43살의 나이로 운명한다.

▲ 강진 다산초당 현판과 다산 정약용 초상화

강진 다산초당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시대의 풍운아, 윤두서의 외증손자, 실학을 집대성 한 거두 다산 정약용은 인근에 있는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할아버지 낙서 윤덕희, 어머니의 본향이 외갓집 녹우당을 자주 찾는다. 외가에서도 가문의 외손자 약용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강진 다산초당으로 각종 자료와 서적, 해남 윤씨 종가집 제철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 정약용의 외로운 유배생활 뒷바라지를 했다. 그곳에서 다산은 불후의 명저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500여권의 책을 집필한다.

▲ 해남겨울배추와 양면꺼리

해남 윤씨 종가집의 절기별 음식과 해남겨울배추와 양념꺼리도 보냈다. 약용은 강진초당에서 김치도 담그고 골고루 여러가지 음식을 해먹었다. 정약용은 해남 녹우당을 드나들며 폭넓은 학문을 익혔고, 외증조 할아버지(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자신이 외가의 외모를 닮았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해남 겨울배추는 해남의 ‘이야기’다

해남 겨울배추는 해남을 닮았다. 배추는 활짝 팔을 벌리고 가슴을 편 모양새다. 하늘 향해 온 마음을 다 내어놓고 세상의 모든 기운들을 다 받아낸다. 바람도 빗물도, 눈도 햇볕도, 날아다니는 먼지도 받고 온갖 벌레들의 침탈도 다 받아낸다.

▲ 눈덮힌 해남 겨울배추

낮에는 햇볕의 기운, 밤에는 별과 달의 기운을 두 팔 벌려 담는다. 땅에 닫기 전에 배추가 먼저 받아낸다. 때가 되면 폭 아무려서 감싸버린다. 그 상태로 한동안 속을 채우고 맛을 키워간다. 배추의 포기가 찬다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새로운 것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난류와 바다가 만들어 내는 해양성기후, 미네랄로 가득한 갯벌, 철분과 아연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보수력과 배수력이 뛰어난 황토, 연평균 13.9℃, 무상일수 293일, 삼면이 바다인 해남에서는 배추가 겨울에도 밭에서 살아있다. 쾌청한 햇살아래 120일 이상 밭에서 자라 배추자체의 단맛과 영양가치가 높아 구수하고 아삭아삭 깊은 맛이 난다. 저장성이 좋아 봄철에도 신선한 채소로서 방금 담은 김치의 맛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겨울철의 소중한 먹을거리 그 자체다.

따뜻한 감성과 풍요로운 인심, 해남사람들, 철새의 무리춤을 비롯한 대자연의 파노라마, 면면히 흘러내려온 역사, 여느 땅과 같지만 그곳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곳 ‘해남’자화상의 윤두서가 먹었고, 다산의 어머니 해남 윤씨가 먹었고, 다산정약용이 먹었던 해남겨울배추.

▲ 해남겨울배추로 담근 해남참배추김치

위대한 생각으로 세상을 새롭게 디자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곱씹어도 재미있고 의미 있다.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윤두서의 손녀딸, 다산 정약용…. 그리고 해남겨울배추, 해남참 절임배추, 해남참 배추김치, 모두 해남에서 벌어진 역사다.

모두 해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