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임 <선구자> 편집주간.

“용인 아파트에 살며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언젠가는 작은 텃밭과 장독대, 마당에 긴 빨랫줄을 매고 살면서 먹을 거는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키우는 것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화생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제 농사일기를 보고 베란다 농사를 시작하겠다는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둘 생겼습니다. 저도 초보 농사꾼이니 중간에 시행착오가 많을 것입니다.

매주 그런 경험까지도 함게 나누면서 많은 분들이 ‘저 아줌마도 하는데 나도 해볼까?’ 이런 생각이 든다면 저는 대만족입니다.” (한경임 김상진기념사업회 <선구자> 편집주간)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가 짓는 베란다 농사 이야기를 매주 독자 여러분께 소개한다. 필자 한경임 씨는 김상진기념사업회 <선구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란다 농사일기②>

베란다 농사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보다. 열무는 마구 웃자라고 애지중지 하는 고추에는 벌레가 생겼다. 작년, 재작년 고추 몇 포기 키운다고 온갖 정성을 들였지만 어느 순간 확 퍼지는 벌레 때문에 꽃이 매달린 채로 고춧대를 뽑아냈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올해도?

페이스북에 내 걱정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더니 많은 분들이 응원과 지혜를 일러주셨다. 사람 사는 동네가 이런 거 아닐까, 마음이 따뜻해졌다.

6월 15일

애지중지 하는 고추가 심상치 않다.

초록 이파리에 누리끼리, 희끄무레한 작은 반점이 점점이 생겼다. 두 해나 연거푸 진딧물에 초토화된 트라우마가 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소식이 왔다. 당최 이유를 모르겠다.

일단 조짐이 보이는 고추이파리 뒷면을 어제 모두 물로 씻어냈다. 오늘 아침 살펴보니 아주 작은 뭐시기가 이파리에 아직도 있다.

결국 어젯밤 부랴부랴 농진청에서 개발했다는 친환경 벌레퇴치약을 주문했다. 고추 세 포기도 잘 키우는 게 이렇게 어렵다. 이제 딱 하나, 고추가 달렸을 뿐인데 갈 길이 멀다.

이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많은 전문가들이 댓글로 도움을 주셨다. 덕분에 이 벌레의 정체가 ‘응애’라는 걸 알게 됐다. 호박잎사귀 뒤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진딧물도 발견해냈다.

응애와 진딧물에 달걀노른자와 기름을 섞어 유화시킨 다음 물에 희석해 쓰는 ‘난황유’가 가장 효과가 큰 대응책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검색해보니 급한대로 마요네즈를 희석해 쓰라고 하신 농부님이 있었다. ‘우와~~대박~~옳다구나’ 무릎을 치면서 마요네즈를 희석해 뿌렸다. 효과는 빠르고 만족스러웠다.

베란다에서 마구마구 웃자라는 열무에 대한 해답도 얻었다.

햇볕의 양이 많이 부족한 베란다 환경에서는 막 올라오기 시작한 새싹이 햇볕이 간절하여 웃자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무 종류나 열매를 맺는 채소는 잎채소보다는 훨씬 강하고 많은 양의 햇볕이 필요하다고 한다. 열무가 웃자라는 건 ‘베란다 열무의 숙명(?)’인 셈이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본 잎이 나와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지지해주는 것인데 그 역할은 바로 흙이 해주었다. 베란다 텃밭에 뿌린 열무는 옆의 흙을 끌어 모아 웃자란 부분까지 덮어주고 텃밭상자의 열무는 모두 뿌리가 다치지 않게 뽑아내서 다시 심어 ‘제자리 옮겨심기’가 되었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덕분에 베란다 텃밭은 한바탕 전쟁이 지나간 듯 이리 저리 깊은 고랑이 생겨났다.

햇볕이 부족해 옆으로 눕다시피 하던 쑥갓도 흙으로 덮어주자 편안해 보인다.

이 해답을 알려준 건 1년간 베란다 농사의 모든 지혜를 책으로 펴낸 박희란 주부다. 장보러 마트에 갔다 보게 되었는데 베란다 농사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었다. 이 책을 보는 내내 내가 얼마나 무식하고 용감한지 알게 되었다. 책표지에 선명한 사진 한 장, 쑥 뽑혀 머리에 흙을 달고 있는 열무가 어찌나 부럽던지….

이 책을 보니 생각보다 일 년 내내 키울 수 있는 채소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시금치처럼 겨울에도 잘 자라는 채소도 있다. 바깥 환경과는 달리 베란다가 온실 환경과 비슷해서다.

베란다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베란다 농사의 가장 기초가 되는 공부이다.

6월 18일

커다란 잎사귀 뒤로 진딧물이 잔뜩 붙어서 날 놀라게 했던 호박이 무럭무럭 자란다.

너무 창가 쪽으로 심어서 창가에서 뒤로 좀 떨어뜨려 매어 놓은 지지대 줄을 소 닭 보듯 한다.

호박한테 덩굴손은 햇볕 있는 쪽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인 것을, 생각해보니 지지대 만든답시고 덩굴 뒤로 줄을 맨 내가 너무 한심하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 장마란다.

장마철은 베란다 농사의 농한기라고 한다. 습하고 더워 대부분의 채소가 잘 안된다는데 좀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장마철엔 오히려 열매채소가 낫다고 한다. 상추는 날이 더워서 그런지 키가 자란다.

내친김에 모종 몇 가지를 더 주문했다. 토란과 가지, 근대와 청상추 그리고 혈압을 낮추는 효능 때문에 꼭 키워보고 싶은 비트. 아, 덩굴손이 안 나와 지지대가 필요 없는 쥬키니 호박도 너무 궁금해서 주문했다. 심을 곳을 마련하지 못한 비트 모종은 토란한테 더부살이 중이다. 부디 다들 너무 늦지 않았기를…

궁금한 게 하나 더 생겼다. 구멍이 없는 화분에 식물을 키울 수 있는 ‘리치 쏘일’이라는 흙이 있다는 데 정말 식물이 잘 자랄까 궁금했다.

딸아이는 ‘리치 쏘일’이 ‘부자 땅’이야 하고 물어 한참 웃었다. 왜 꼭 외국말을 갖다 붙이는지 정말 웃기다. 몇 년을 화분갈이 하지 않아도 식물이 잘 자란다는데 이번에 사보았다.

이 흙의 좋은 점은 흙을 담을 수만 있다면 어디에도 식물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난 커피봉투에 심어봤다. 햇볕을 많이 필요한 채소는 에어컨 실외기 위에 잠깐씩 놓아둘 수 있어 좋다. 화분이 아니라서 베란다 창살을 통과해 에어컨 실외기 밑에 공간에도 둘 수 있다. 몇몇 채소는 필요에 따라 이렇게 키우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베란다 농사를 시작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내 생활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일단 하루가 재미있다. 모종을 심기 위해 흙을 나르고 물주고, 해바라기 시키느라 텃밭상자를 이리저리 옮기고 새싹을 솎으며 심하게(?) 들여다 본 날은 꿀잠을 잔다. 집안일과 세상일에 지쳐 힘든 것과는 많이 다르다.

또 끼니때마다 하는 음식이 단순해지고 채소를 많이 먹게 된다. 내가 키운 것이니 귀하기도 하고 넘쳐나게 거두지도 않으니 남김없이 모두 먹게 된다. 반찬을 뭘 할까 고민하기 보다는 이 채소로 뭘 할까 생각한다.

혼자 먹는 밥도 잘 챙겨서 맛나게, 천천히 먹는다. 내가 혼자 먹는 밥은 주로 쌈밥이니 빨리 먹을래야 빨리 먹을 수 없다. 자연히 천천히 오래오래 씹고 맛나게 먹는다. 지혜를 나누어 주는 온라인 친구들과 소통하는 것도 사람 사는 재미가 있다.

다만 베란다 가득 올망졸망 자리를 차지한 텃밭상자 때문에 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편은 난민 신세가 되었다. 절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