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글 슬로푸드문화원 생물종다양성위원회 간사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슬로푸드(Slow Food)’에서는 종 다양성의 보존이라는 중요한 목표 아래에 ‘맛의 방주(Ark of Taste)’ 프로젝트를 펼쳐나가고 있다.

맛의 방주 프로젝트는 잊혀져가는 음식의 맛을 재발견하고, 멸종위기에 처한 종자나 품목 등을 찾아 기록하고, 목록을 만들어서 널리 알리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오는 10월에 개최될 남양주국제슬로푸드대회를 앞두고, 맛의 방주 등록을 서두르고 있다. 이에 (사)슬로푸드문화원에서는 맛의 방주 프로젝트에 대한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푸린독새기콩’

제주도 한라산 남쪽. 이 지역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푸른콩’이 자라고 있다. 푸른콩은 제주 말로는 ‘푸린독새기콩’으로 불려왔다. ‘푸른 달걀 콩’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콩은 살짝 푸른빛을 띤 달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콩은 제주도에서 ‘장콩’으로 불리고 있다. 육지에서는 보통 노란콩을 ‘메주콩’ 이라고 부르는데 노란콩이 있음에도 푸른콩을 장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장을 담글 때에 노란콩보다 더 흔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콩에 비해 삶았을 경우에 단 맛이 좋고, 찰진 편이라 장을 담글 때에는 물론 콩국수용으로도 매우 좋다.

푸른콩의 위기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푸른콩을 이제는 제주에 있는 전통시장에서조차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나마 푸른콩으로 된장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한라산 청정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외 몇 남지 않은 농가들에서는 직접 장을 담글 용도로 조금씩만 재배하고 남는 것들만 가끔 오일장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이렇게 맛좋은 푸른콩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찾아보기도 힘들어진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산업화와 고령화에서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효율성과 이익의 극대화를 우선시하는 산업화로 인해, 저렴하고 생산성이 높은 수입콩과 개량된 종자가 장의 주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콩 소비는 90% 이상을 미국산 유전자조작(GM) 콩을 포함한 수입산 콩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맞물려 고령화로 인해 직접 장을 담그는 풍습이 사라지면서, 자급을 위한 재배도 줄어들고 있다.

최근 제주도의 콩 재배 농가는 콩나물콩의 재배를 선호하고 있다. 대기업과 농협을 중심으로 유통이 조직화 돼있고, 수확시기도 빨라 농가 입장에서는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푸른콩 지킴이, ‘한라산 청정촌’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푸른콩을 지켜오고 있는 곳이 있다. 서귀포 중문단지 주변에 있는 ‘한라산 청정촌’이다. 김민수(47), 박영희(44) 부부는 1997년부터 2대째 된장 사업을 이끌어 오고 있다.

어머니 양정옥 씨는 푸른콩 씨앗을 보존하고 재배를 늘리는 데 많은 노력을 해왔다. 씨앗을 구입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늘 대량 보관했고, 계약재배지역 역시 여러 곳으로 나누어 시행했다.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다른 농가에서 푸른콩이 거의 사라질 위기에 놓였는데, 이 때 장을 많이 담그는 것을 포기하고 씨앗용으로 콩을 나누어 주어 명맥을 유지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김민수, 박영희 부부는 2003년부터 사업을 물려받았다. 부모님을 도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장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은 물론, 지역에 이를 알리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린이, 학생, 주부, 영양교사 등 다양한 계층에게 전통식문화 프로그램을 수년간 진행하고 있다. 교육장 한쪽 벽에는 아이들이 농산물에 대해 재미있게 그림을 그리고 적어놓은 메모장이 붙어있다. 교육을 제주도 향토언어로 진행하고 있는 점 역시 눈여겨 볼만하다.최근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우수 체험농장”으로 선정되어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하나의 토종 콩이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한 품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품종과 같이해왔던 수많은 삶의 양식, 정서,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집마다 달랐던 전통장이 이제 전 국민이 똑같은 몇 종류의 장만을 먹는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자식 세대가 그 음식에서 나오는 향에 익숙하지 못함으로 인해 조부모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점점 가족이 분열되는 것도 이러한 품종의 사라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수 대표의 말처럼 하나의 전통음식을 보존함으로써 우리는 많은 것을 지킬 수 있다. ‘맛의 방주’가 온 국민이 우리 종자, 우리 음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행동하는 데에 큰 기폭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슬로푸드문화원에서는 사라져가는 생물종과 관련된 향토음식에 대한 제보를 받고 있습니다.
(이메일 접수 : fourmis8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