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권 이야기농업연구소장

나는 1980년대 초·중반 강제징집을 당해 철원 김화 백골부대(3사단)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79학번으로 1981년도에 전두환 정권 퇴진운동으로 무기정학을 당해 1년 반 동안 퇴교되었다가 복교한 연후라 내 나이는 당시 말년병장들과 같거나 그들보다 많았다.

나이 먹은 어설픈 신병의 눈에 군대생활의 피사체들이 내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익숙해질 무렵, 금산에 계셨던 아버지가 책을 보내 주시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노자>와 <장자>를 비롯해 <한비자>를 포함해 동양 철학자들의 책들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써클에서 학습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동양의 사상들을 공부하긴 했지만 쉽게 와 닿지 않았던 터……. 군대에서 읽은 <노자>도 <장자>도 의욕은 불탔지만 혼자의 힘으로 내 것으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두세 번 헤아렸던 느낌들은 이후의 내 삶에서 간혹 호기심을 발동시켜 일이 막히거나 정체될 때 <노자>와 <장자>를 펼쳐보게끔 하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25년 동안 유기농산물 유통사업에 몰두하다 몇 년 전 ‘이야기농업’이란 분야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남았던 문제가 있다.

‘농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예전의 농업과 인터넷과 SNS시대의 농업은 무엇으로 구분해야 하는가?’, ‘21세기 농업의 사유 대상은 시공간으로 어떤 범주인가?’, ‘이야기(스토리)는 어디로부터 출발하는 것인가?’.
얼마전 EBS <인문학 특강>에서 방영된 최진석 서강대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특강 14강 전편을 이틀에 걸쳐 시청했다.

지난 30년 동안 어슴푸레하던 노자와 공자에 대한 내 생각들이 나름 조금 더 확연해지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세상에! 철학을 이렇게 알기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 하는 게 가능하구나!”싶어 최진석 교수의 내공에 경의를 표한다. 내가 느낀 그 깊이야 알량하겠지만 늘 고민하던 몇 가지 영역에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인문’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다. 그 무늬를 따라가며 ‘세계가 보이는 대로 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부강한 나라다. 유무상생(有無相生), 무위(無爲), 무불위(無不爲), 도(道)…….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그 중간점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노자와 공자의 같은 문제인식, 서로 다른 해법은 자못 흥미로웠다.

이야기로 농업에 새로운 무늬를 입히자

언젠가 어느 교육생으로부터 ‘이야기농업의 실체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렇다 저렇다 몇 마디 이야기했지만 참 곤궁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가 ‘인문’이면, 농업이 그리는 무늬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노자는 이름을 짓지 말라고 했다. 어떤 사물이나 개념에 이름을 짓는 순간 구분이 되고 차별이 생기고 이편저편이 생겨서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부분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굳이 이름을 붙여본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먹고사니즘’ 즉 농업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다. 생명으로 보면 사람과 농사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농업인문학’이라 칭한다. 이어서 21세기 대한민국에서의 농업인문의 실천 활동으로써 ‘이야기농업’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상은 변화하고 변화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 세상이 보여지는 대로 보고 자기의 삶을 그려가는 활동이다.

지난 60여 년간 한국의 농업은 획일, 희생, 일방, 규제, 시혜, 비교열세, 비주체성, 비탄력성, 집단 등의 속성 값을 지녔었다면, 21세기 들어 인터넷과 SNS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값을 요구받고 있다. 과거의 모순을 걷어내기를 요구하는 바 양방소통, 창의, 상상, 자유로운 영혼, 문화, 컨텐츠, 주체성, 탄력성, 개인과 같은 속성 값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농업적 사유의 대상도 기존의 농산물 생산과 소비측면에 맞춰 강요되던 눈앞의 마케팅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농업농촌을 버리고 산 지난 50년, 그 시공간부터 멀리는 50만 년 전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된 시점, 그리고 미래 이 모든 것이 농업의 사유 대상이 된다.

‘돈 안된다’ 같은 일방적인 구분이나 ‘촌놈이다’ 같은 선입견으로 한없이 위축되어진 산업 간의 경계를 넘어, 농업과 농촌이 품고 있는 수많은 자연과의 관계, 그로 인해 표현되어지는 아름다움들도 대상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농업농촌이 갖는 위대성이 꽃피는 세상을 꿈꾸는 것’까지 사유의 대상이 된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는 반드시 농업이 그리는 무늬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이야기농업은 농촌이 그리는 무늬를 표현하는 것이다.
농업이 그리는 무늬를 상상하는 것이다.
농업인이 그리는 무늬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농업농촌이‘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 모여 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