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임 용인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주부

최근 기온이 뚝 떨어진데다 오랜 만에 초등학교 동창들과 만나 늦게까지 심하게 이바구를 나누었더니 감기가 살짝 왔다. 이 친구들은 나와는 살아온 내력도 다르고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모두 다르지만 ‘깨복쟁이’ 친구라는 것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요즘처럼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큰 위로가 된다. 위로의 대가로 얻은 감기니 빨리 나을 것이다.

내 일터는 우리 집과 가족이다. 아르바이트 정도의 재택근무를 오랫동안 했지만 내게 직업을 묻는다면 전업주부가 진짜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살림을 정성껏 돌보고 아이들을 보살피는데 온갖 노력을 다해도 화폐를 땡겨오는 일이 아닌지라 세상은 보통 ‘일 안하는 사람’, ‘경제력 없는 사람’으로 날 부른다. 세상에는 돈으로 바꾸기 힘든 가치들이 ‘천지삐까리’로 널려 있는 데도 말이다.

내가 어릴 적 엄마는 다섯 자식을 키우는데 한없이 모자라는 아버지의 월급에 보탬이 될까 해서 행상을 시작하셨다. 엄마는 아침 일찍 나가셔서 저녁 늦게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셨다. 사실 엄마가 아니었으면 나를 포함한 형제들의 대학진학은 꿈도 꾸기 어려웠을 거다.

엄마가 일을 시작하자 형제라곤 사내만 넷인 우리 집 살림살이 반쯤은 내 차지가 되었다.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남들도 다 그리 사는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 되돌아보니 다른 친구들에게 있는 10대 시절이 내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숙이 그늘로 남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아이를 낳고 화폐를 땡겨오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던 건 이 그늘의 영향이 참으로 컸다. 이건 온전히 내 기질 탓이지만 말이다. 내가 뭔가를 키우고 돌보는 데 재능이 있고 행복해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이때 쯤이다.

20대 때는 고달픈 부모님의 삶으로부터 세상을 보았다. 내 부모처럼 정직하고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져야 하는 거 아닐까 하면서.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아이들의 미래를 두고 세상을 보게 된다. 이처럼 험하고 힘든 세상에 내가 용감하게 아이를 둘이나 낳았구나. 이 아이들의 미래가 삼포 세대라니. 국민소득 2만불 시대에 돈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자식도 포기하는 세상이라면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된 거 아닌가.

나이 50을 코앞에 두고 나니 내 마음을 자주 들어다 보게 된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려면 내 마음을 믿고 잘 들여다보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다. 작년에 처음으로 베란다 농사를 시작했다. 언젠가는 10평정도 작은 집에 텃밭을 가꾸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삶을 꿈꾼다.

베란다 농사는 이래저래 불안한 세상살이에 지친 마음을 참으로 편안하게 해주었다. 내게는 명상이었다. 작년 유난히 긴 장마가 초보 농사꾼인 내게는 끔찍한 시련이었지만 나름 큰 공부가 되었다.

작년 봄 모종으로 심었던 근대는 내게 여러 번 잎을 나누어주고도 이 추운 날 변함없이 푸르다. 쑥갓은 씨앗으로 심었던 것인데 거의 나무(?) 수준일 만큼 무성히 잘 자란다. 꼭대기 순을 잘라 서더리탕에 몇 번이나 넣어 먹었는데도 자꾸 순을 내놓고 있다. 근대와 쑥갓에는 아직도 진딧물이 붙어 있긴 하나 극성스럽진 않다. 틈틈이 물줄기로 씻겨 내고 손으로 잡아준다.

한겨울 추위에도 우리 집 베란다를 푸르게 지켜준 두 녀석들이 고맙다. 올해에도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생각이다.

▲ 근대

▲ 쑥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