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호 PDF 파일 지면 8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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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숙 시인,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오월이 들어서기 무섭게 이팝나무 가로수가 밥사발을 만들어 댄다. 도심이나 한적한 시골 소도시나 할 것 없이 이른 봄엔 벚꽃이 만발하고 5월엔 이팝나무로 뒤덮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팝나무는 멀리서 보면 밥사발 고봉으로 퍼올린 우리 아버지 세대가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이밥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
 
이팝나무보다 좀 더 일찍 피는 것이 조팝나무인데 이것도 흰꽃이 메지게 펴서 논두렁에 산비탈에 밥사발이 만들어 진다. 이팝은 이밥의 된소리이고 이밥은 흰쌀밥의 황해도나 평안도 말이다. 특히 산골에 논을 부치기 어려운 곳에서 쌀밥을 이밥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우리민족의 포한이 무엇인가. 이밥에 고깃국이고 이 포한은 이북의 사회주의 건설의 모토였다.
 
이밥에 고기국 한 그릇이면 세상을 다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팝나무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이 길어서 흡사 장립종 인디카계열의 쌀처럼 보인다. 우린 이 쌀을 알랑미라 불렀다. 알랑미는 안남미이고 안남은 베트남이다. 이 쌀은 끈기가 적어서 밥을 지어놓으면 훅 불면 날아간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니 이 쌀은 끈기많은 우리 쌀 보단 먹어도 먹은 것 같잖고 힘이나질 않는 다고들 했다.

요즘은 누구나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그 잘난 알랑미 한번쯤은 다들 드셔 보았을 것이다. 과연 힘이 없고 먹은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알량미라고 폄하했던 그 쌀이 단립종인 자포니카보다 영양적 측면에서 모자라는 쌀이 아니다. 더욱 인디카계열의 쌀이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점에선 자포니카보다 낫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인디카 쌀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알량한 알랑미가 되고 말았다.

알랑미로선 억울한 일이겠지만 알랑미가 된 사연을 보면 우리가 우리 쌀에 대한 욕구나 자존감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말해주는 단초다. 우리 쌀이라야 힘이 난다는 말이다. 곧 우리는 우리 쌀을 먹어야 비로서 우리로써의 정체성을 갖을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안남미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온 것이 1876년 이른바 강화도조약 직후이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의 초기산업화시기 요코하마 노동자들에게 값싼 쌀이 필요했다. 우리나라 쌀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은 쌀을 가져가는데 성공했다. 조선은 일본의 무력 앞에 쌀 수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주들은 보다 비싼 가격으로 수출하니 ‘꿩 먹고 알 먹고’ 였다.
 
주려죽는 것은 민중들이었다. 이때 조선은 안남에서 쌀을 수입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것이 최초 안남미의 한반도 진출이다. 우리들에게 아프도록 각인된 알랑미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그 후 한국전쟁 시 원조곡물로 들어온 것도 알랑미다. 군둥내가 나는 쌀이지만 그것도 없어서 일명 꿀꿀이죽이라 불리는 군대잔밥을 끓여 먹었을까. 이팝나무꽃이 활짝 피는 5월 6일 한, 베트남 자유무역협정이 최종타결 되었다는 소식이다.

그렇잖아도 쌀 수출 2위국인 베트남이 태국 등 경쟁국들 때문에 쌀수출에 고전을 하고 있다. 한, 베트남 자유무역협정은 우리 쌀에 어떤 바람을 몰고 올지 우려스럽다. 쌀뿐 아니라 이미 제주도 농가들은 초비상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도 정부는 쌀농사를 포기하려는지 밥쌀용수입쌀 1만톤을 들여와 공매에 나서 농민들의 뭇매를 얻어맞고 있다.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배불리 먹고 싶은 욕망이 이팝나무를 만들어 냈는데, 도시인들에겐 가로수일 뿐, 무심한 하얀 꽃들만 바람에 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