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호 PDF 파일 지면 8면 참조

===>>지면보기

逢草 이권수

울릉도의 겨울 들판은 온통 눈판이다. 차디찬 대지는 파란 세상을 접게하고 또 다른 계절인 내년 봄을 기약한다. 그러나 두껍게 내린 눈밭의 세상이 너무 길어지는 때에는 겨울 숲을 활보하는 새들의 삶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 된다 한겨울 설한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그 먹잇감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꽁꽁 언 땅을 기고, 뛰고, 날고, 할퀴고, 쥐어뜯고, 헤매다가 눈 속에서도 자리를 비집고 풀빛을 내는 파란세상이 있다.
 
하얗게 뒤집어쓴 그 눈밭 속을 헤집어 보면 그 옛날 아비를 위해 죽어간 대장간 불쟁이의 딸! 그쑥부쟁이가 ‘부지갱이’로 환생하여 살아가고 있음이 확인된다.

30년 전 어느 해 겨울이었고 그때는 내가 부모님이 계시는 곳에 농사일을 돕기 위해 휴학하고 잠시 동안 울릉도에 와있을 때였고 그것을 기회로 그 친구도 머리나 식힐 겸으로 이곳에 여행을 오게 되었다. 그는 사실 그동안 울산이라는 곳의 토박이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곳의 경험이 적었기에 울릉도의 겨울 눈 광경을 너무도 신기해했는데 역시 그때도 보란 듯이 눈(雪)이 와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현혹된 친구는 기분이 좋았던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저없이 곧바로 혼자 마을의 이곳저곳을 눈을 밟으며 다녔고 한참을 헤매며 다니다가 돌아온 그의 외투주머니엔푸른나물들이 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거 산나물 맞제? 눈을 헤집어 보니까 그 속에 이게 많더라!” 그는 기쁨과 감동의 눈길로 그 흡족한 나들이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뭐 잘해줄 것도 없는 형편에 엄마는 우선 친구가 뜯어온 그 부지갱이 나물만 그냥 살짝 데쳐서 대충 된장무침으로 맛보게 해 주었다. “우와! 이런 맛 진짜 첨이다!” 절정의 감탄사를 질렀다.
 
그 후 10년, 20년을 지나오면서도 때마다 늘 그때의 그 얘기를 꺼내며 감동의 그 맛과 여운을 그리움 처럼 얘기하곤 한다. 어째 한낱 나물한번 맛 본 일이 그렇게 잊혀지지 못할 일이던가?

섬쑥부쟁이는 그 추운 시기에 겨울잠을 자는 식물이 아니라 그 겨울에 깨어서 살아가야 할 상록(常綠)성식물이기에 그런 혹독한 설한의 추움속에서도 알몸인 채 살아가는 고통의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 더욱더 짙은 향기(플라보노이드)를 내게 되고, 더욱 알싸한 맛(‘프리데린’성분)을 내게 되고, 그래서 더욱 풋풋한(‘퀘르체틴’성분)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섬쑥부쟁이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멋진 먹거리다. 겨울 아궁이 옆에 쌓아둔 땔감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자신의 생을 불태우며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불의화신 그 ‘불쟁이의 딸’ 이었다. 동생들을 부양(扶養)하고 아버지를 봉양하며 또한 자기의 생을 비관하지 않고 그 겨울 속의 쑥을 뜯었던 열렬한 그여심(女心)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쑥부쟁이를 부지깽이 나물이라고 부른다. 부지갱이(부지깨이)다디단 붉은 줄기에 싱싱한 푸른 잎사귀너는 기어이 추운 겨울 위에 독야청청(獨也靑靑) 사는구나. 세상을 독하다 탓하랴 못난 네 생애를 탓하랴 그 속내에 불쟁이 딸아이의 가슴이 실려 있으니 한 입 깨물어 허기진 내 배나 채움이 가히 송구스럽구나.

허구한 많고 많은 생의 갈림길에서도 차라리 죽지 않고 살아있음은 이렇게 붉은 너의 독기를 보며 천 번쯤은 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