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호 PDF 파일 지면 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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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푸드 장수지부 회원인 초록누리협동조합의 방 과후마을학교. 과자만들기와 꽃차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슬로푸드 장수 지부는 2013년 8월에 장수에서 처음 슬로푸드 모임을 열면서 시작했다. 회원은 다섯 사람과 하나의 조직. 장수 지역에서 농촌의 지속가능성에 교육으로 기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록누리협동조합도 회원이다. “슬로푸드 회원 중에 단체가 회원으로 가입한 것은 이곳이 처음일 것”이라고 박진희 대표는 웃었다.

장수는 통칭 ‘무진장’으로 불리는 무주군, 진안군, 장수군 중 한 곳이다. 전라북도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이보다 깊숙한 시골은 별로 없으리라.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도시에서처럼 회원 배가 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회원 각자가 슬로푸드에 대해 철학이 확실한 뛰어난 분들이다.

“장수 지부장은 장계면 육십령휴게소의 조철 셰프세요. 이 휴게소에서는 조 셰프 부부가 지역농산물로 만든 장수돈가스와 파스타를 맛볼 수 있는데, 이미 수차례 언론에 소개될 만큼 유명세를 탔지요. 휴게소 매점의 매대에도 장수 농산물들이 놓여있고요. 이곳에서는 저희 부부와 지역 농부들도 참여해 장수의 농산물로 레시피를 만들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먹거리 교육이 진행 중이에요. 초록누리협동조합 역시 슬로푸드 음식 교
육을 하고 있고요.”

‘회원을 늘리려고 애쓰기보다는, 지부의 활동이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그는 장수 지부의 활동을 설명했다. 1996년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박 대표는 1998년 부터 회사의 노조 상근자가 되었다. 10여 년간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하다가, 환경과 자연에 대한 감수성에 이끌려 2008년에는 녹색연합에 간사로 들어갔다. 2009년에 가족들을 먼저 장수로 내려 보낸 후, 2010년 5월에 완전히 귀농했다.
<임은경 기자>

회원은 사람 다섯 + 협동조합 하나
“아이들이 시골에 내려오니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어요. 도시에서 살 때와 다른 감수성을 가지게 되고요. 한번은 ‘엄마 일 마치고 7시에 간다’고 했더니, 큰딸이 ‘5시에 와야지 노을을 볼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아이들도 시골 생활에 만족하고, 엄마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아요.”

박진희 대표가 벌이고 있는 ‘푸드 저스티스’운동은 슬로푸드 안팎에서 유명하다. 장수로 귀농한 후, 부부는 유기 농사를 지으며 도시로 꾸러미 택배사업을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그는 유기농이 단지 질병의 대체식단으로 인식되거나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과연 누구를 위한 유기농사인가’라는 그의 고민이 시작됐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서초동의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어요.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건너편에는 서초동의 부촌이 있었죠.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면 주인아줌마가 ‘왼쪽에서 왔냐, 오른쪽에서 왔냐’ 물어보기도 했어요. 받는 분들의 건강을 생각해 열심히 농사지은 유기농 꾸러미를 정작 가난한 사람들은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저를 고민하게 했어요. 그러다가 ‘푸드 저스티스’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됐지요.”

그때부터 저소득층을 위한 지역아동센터와 공부방 등에 1주일에 한 상자씩 유기농 꾸러미를 보내기 시작했다. 비용은 다른 꾸러미 고객들에게 ‘먹거리 정의’ 기금을 받아서 해결했다. 꾸러미 한 상자가 2만5천원이라면, 여기에 2천5백원의 ‘먹거리 정의’ 기금을 포함해 2만7천5백원을 받았다. 다른 꾸러미보다 10% 정도 비싸지만 박 대표의 설명을 듣고 선뜻 사주는 고객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 이게 가능하구나, 이걸로 소셜 벤처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셜 벤처 ‘푸드앤저스티스 지니스 테이블’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죠. 고용노동부와 사회적기업진흥원이 진행하는 소셜 벤처 공모전에 지원해 2012년에 전국대회에서 장려상을 받고, 2013년에 창업을 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아플 때 돈이 없어도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국민건강보험은 권리로 인식하면서, 음식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소득이 양극화되면서 ‘먹거리 양극화’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 박 대표의 주장이다.

‘먹거리 정의’는 동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
“푸드 뱅크, 결식아동 지원 프로그램 등 결식을 방지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기탁한 음식,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으로 연명만 하도록 해주는 수준이에요. 굶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거죠. 그 과정에서 수혜자들은 저소득층이라는 ‘낙인 효과’를 경험해야 하고요. 결식 지원이 아니라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유기농산물과 좋은 먹거리를 적정 가격에 구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그것이 제대로 된 먹거리 정의지요.”

이들에게 공급하는 유기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부에게는 적당한 가격을 보장해주고, 일반 농산물과의 가격 차이는 각종 재단들이나 지방자치정부가 보조해주는 제도가 정립돼야 한다고 박 대표는 말했다. 그가 정말로 추진하고 싶은 것은 ‘시민 야채가게’다. 유기농 야채를 파는 가게인데, 누구나 와서 물건을 살 수 있지만 저소득층은 푸드 바우처 기능이 내재된 카드를 이용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회원카드를 발급하되, 저소득층은 미리 금액이 적립돼 있어서 아무도 그가 저소득층이라는 것을 모르도록 말이다. 소위 ‘낙인 효과’를 막는 장치다.

2013년 겨울부터 매달 진행해온 ‘먹거리 정의를 이야기하는 30인의 밥상’은 ‘푸드저스티스 지니스 테이블’의 주요 사업 중 하나다. 슬로푸드 김포지부에서도 이것을 모델로 ‘이야기가 있는 30인의 밥상’ 행사가 매달 열리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박 대표의 부군이 아프면서 요즘은 30인의 밥상을 포함해 강연 등 대외 활동을 잠시 쉬고 있다.

그래도 2015년 창원자활센터 해밀협동조합과 함께한 ‘건강밥상 꾸러미 사업’ 등 농사의 가치를 알리고 음식시민을 발굴하는 도농교류 프로그램은 계속 진행 중이다. 국제슬로푸드 한국협회와 함께 농사, 교육, 컨설팅 부문에서 해온 먹거리정의 활동도 계속 꾸준히 해나갈 생각이다.

“저는 페이스북이라는 사회관계망 서비스(SNS)가 너무 고마워요. 제가 사는 동네는 다른 마을하고도 뚝 떨어진 해발 520미터 산자락이에요.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세상과 의견을 교환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모두 페이스북이라는 훌륭한 시스템 덕분이었지요.”

'푸드 저스티스' 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3년. 우리 사회에 ‘푸드 저스티스’라는 담론을 확산하는 데 ‘지니스 테이블’이 한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몇몇 지자체에서 먹거리 기본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아직은 먹거리에 대한 인식 수준이 시민의 기본권 보장 수준까지 나아가고 있지 못해요. 로컬푸드를 실현하고 불량식품으로부터 시민을 지키겠다는 수준이지, 기본권으로서의 식량권을 공급하겠다는 것은 아니거든요. 많은 분들이 시민 먹거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정부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어요. 농민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 역시 먹거리 정의의 중요한 담론으로 확산돼야 할 문제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