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닷컴
식량민주화슬로푸드
슬로푸드 김지연 칼럼, 곰삭은 세월의 맛 “삭힌 김치“슬로푸드 공정여행가 수원시학교급식지원센터장 김지연
한기자 기자  |  mfood119@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12.17  09:30:23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Kakao Kakaostory 네이버밴드

선선하게 느껴지던 바람이 어느덧 쌀쌀해지고 해진 어둔 밤이면 뜨끈한 아랫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고구마에 처억 처억 김치를 얹어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벌써부터 김장을 시작하는 집이 있어 겨울이 시작 되었구나 비로소 알게 된다.

10년 전 내가 먹는 음식의 식재료부터 농사를 지어 먹어보자....라는 기특한 생각으로 농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토종종자에 대한 고마움과 새로움을 동시에 느꼈던 적이 있었다.

이맘때 즈음이면 갈무리를 해서 김치를 담아 먹던 토종배추인 ”구억 배추“가 그 중 하나인데 제주도 한경면 구억리의 할머니 한 분이 소중히 보존했던 배추다. 알음알음 재배하던 구억 배추는 현재 여러 군데에서 소규모로 재배하고 있다.

   
▲ 토종 구억배추

이 녀석은 일반적으로 먹는 배추(호배추:Chinese cabbage)와는 달리 속이 덜 차오르고 노란 속잎보다는 파란 잎이 더 많고 질기며 톡 쏘는 맛을 가지고 있어 호불호가 좀 갈린다.

코가 뻥 뚫리는 맛 ”삭힌 김치“를 아십니까?

얼마 전 예산에서 이 ”구억 배추“를 사용한 제대로 된 ‘진미’를 만났다.
충청남도 예산에는 구만포가 만들어낸 예산만의 특별한 김치가 있다. 깨진 독에 담가 하얀 곰팡이가 필 때까지 삭혀서 먹는 삭힌 김치가 바로 그 특별한 김치다.
”삭힌 김치“가 바로 코가 뻥 뚫리는 맛을 가진 김치의 진미라고나 할까?

예산 동네 할머니들이 들기름을 넣고 달달 볶다 뜨물을 부어 끓였다는 국을 맛보게 되면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 삭힌 김치찌개

삭힌 김치는 김장 후 허드레 김치에 젓국을 넣어 만드는데, 그 김치를 금이 간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는다.

그러면 김칫국물이 항아리의 깨진 틈으로 아주 조금씩 새어 나가면서 서서히 발효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위의 어머니 대의 알뜰함 역시 김치에 곰삭아 녹아 있는 것만 같다.

원래는 김장 배추 위를 덮던 우거지까지 알뜰하게 먹기 위해 시작됐던, 평범한 젖은 시래기 형상의 김치지만 국물이 빠지는 깨진 독에서 발효된 원리와 독특성 때문에 이제는 국제 슬로푸드 프로젝트 ‘맛의 방주’에도 등재 될 정도로 그 맛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언뜻 보면 김치 담그는 법과 유사한데, 하나씩 따지고 보면 재료 선택부터 숙성, 보관까지 철저히 다르다. 일반 김치와는 달리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새우젓으로 맛을 낸다.

일단 토종 종자 ‘구억 배추’를 사용할 것. 김장할 때 쓰는 일반 배추(호배추)는 부드러운 질감으로 삭히면 오래 보관할 수 없다. 한데 구억 배추는 잎사귀가 길고 질기며 속이 텅 빈 것이 특징으로 오래두고 삭혀 먹는 ‘삭힌 김치’를 담그기엔 안성맞춤이다.

흡사 백김치처럼 하룻밤 소금에 절인 배추를 깨끗이 씻어 파와 마늘, 생강, 새우젓으로 양념하는 게 1단계. 잎사귀 하나하나 속을 채울 필요 없이 그저 버무리면 된다.

이때 염도도 중요한데 삼삼하게 간을 해야 쉽게 삭을 수 있다. 완성된 배추를 깨진 항아리에 담는 게 2단계. 배추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야 삭기 시작하는데, 쓸모없었던 항아리 구멍이 물 빠짐을 책임진다.

실온 숙성 단계에선 변함없는 관심이 필수. 항아리 속 배추들이 삭는 시점이 각기 달라 윗부분에 하얀 곰팡이가 피어오르면 먼저 꺼내 저장고에 넣고, 쌓인 순서를 바꿔 일정량을 추스른 다음 다시 숙성시킨다.

특히 가장 아랫부분에 놓인 배추는 무를 수 있어 계속 뒤적여줘야 한다. 완전히 삭을 때까지 5-7일마다 한 번씩 상태를 체크하는데, 50포기 정도 들어가는 항아리에 넣어야 위아래 모두 고르게 삭힐 수 있다.

보통 10-11월경 담가 3월 말이나 4월 초부터 먹는데, 삭는 즉시 바로 저장고에 넣어야 그 맛이 그대로 유지된다. 또 항아리를 따뜻하게 보관하면 좀 더 빨리 삭기도 한다.

들깨가루를 푼 된장국이나 쌀뜨물에 삭힌 김치를 넣고 한소끔 끓이면 요리가 된다. 삭힌 김치는 '홍어 김치'로도 알려졌지만 사실 홍어 맛은 안 난다.

겉보기에는 물러있을 것 같은 외형이지만 씹으면 아삭하다.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산뜻한 발효 향이 난다. 삭힌 김치를 먹어봤던 외국인이 치즈 맛이 난다고 했던 게 이해가 됐다. 전에 먹어왔던 배추김치와 다른 식감과 맛이다.

   
▲ 곰삭은 삭힌 김치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충남의 음식

충남의 음식은 담담하다. 양념도 최소화하여 재료 그대로의 맛을 잘 살렸지만 그렇다고 마냥 소박하기만 한 건 아니다. 그 이유는 충청도 지역이 수도권에서 가깝다 보니 양반의 본가가 많이 있었는데 살림은 한양에 차려 나랏일을 보고, 본가는 지방에 있는 식이였기 때문이다.

반가의 음식은 궁중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궁중음식 또한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양반들은 임금이 하사한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았고, 그런 음식을 본가에서 해 먹기도 했다. 본가의 음식은 지역민들에게 알게 모르게 전파됐다. 반가의 살림을 돕는 지역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충남 예산의 대표적인 반가를 찾아보자면 다름 아닌 조선 후기 대학자, 추사 김정희 선생이 있다. 여름 은어, 가을 전어, 사계절 장을 달리해서 먹은 미식의 흔적들을 그가 남긴 여러 편지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지역에 양반이 많았던 이유는 이곳이 평화롭고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우선 예당평야를 비롯한 넓은 평야가 많다.

그래서 쌀농사가 잘된다. 또 타 지역에 비해 자연재해를 심하게 받지 않는 편이다. 공주, 천안, 예산이 특히 그렇다. 높고 험한 산이 많지 않아 물이 흘러들어 홍수가 나거나, 골이 깊어 더운 공기를 가둬 폭우가 쏟아지는 일이 적었다.

지형이 아늑하게 들어가 있어 외세로부터의 침략도 비껴갔다. 오죽하면 천안(天安)이라는 지명에 담긴 뜻이 ‘하늘 아래 편안한 동네’일까. 넉넉하고 여유롭다 보니 음식도 조선시대 양반의 기품을 닮았다.

느리지만 짱짱한 손맛이 어우러져 있고 소박하지만 기품이 있는 충남의 내림 음식이 후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래본다.

< 저작권자 © 식량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한기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