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라운드 못 막으면 우리 농민 다 죽는다!’
‘WTO 쌀개방 못 막으면 우리 농민 다 죽는다!’
‘한미 FTA 못 막으면 우리농민 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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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0년 사이 농민회의 주요 구호는 수입개방으로 우리 농민이 다 죽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가끔 어르신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만날 죽는다 그러더니 다 잘 사는구만 뭐’ 하는 말씀들을 하실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투쟁이 지지부진할 때 농민회 간부들의 입에서 ‘쫄딱 더 망해봐야 농민들이 정신을 차린다’는 농담 섞인 푸념이 나올 때가 있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아직 덜 망해 보았는가?

▲ 전용중 전농경기도연맹 사무처장

인구 중에 6%를 차지하는 농민의 숫자는 전업농만을 놓고 보면 형편없는 숫자로 줄어든다. 거기에 도시보다 3배 심각한 고령화의 진행은 70세가 넘어도 트랙터를 몰고 생업전선에 주전 선수로 뛰는 경우를 흔하게 만들었다. 10년 전에 비해 실질소득은 20% 감소하였으며 농가부채는 200% 증가하였다. 농촌의 양극화는 도시의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놀란 개구리가 금방 튀어 나오지만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끓이면 개구리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왠지 서글프게 다가오는 현실이다.

우리 농민들은 잘 살고 있지도, 덜 망하지도 않은 것이다. 우리는 망할 만큼 망했고, 죽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짝사랑?

평생을 살면서 쌀값이 오르기보다는 땅값이 오르는 것이 진리인 것을 체험으로 아는, 민주주의나 통일은 입 밖에 내어서 별로 득이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면직원이나 농협 직원과는 맞서는 것보다 술 한 잔 같이 하는 사이가 이롭다는 것을 아는,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자신도 세상의 한가운데서 열심히 사는 것 같던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던 추억이 오히려 그리운 분들과 우리는 살고 있다.

경상도 수준의 박근혜 지지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멘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동안 외쳐왔던 정치적 구호나, 생존권적 요구가 우리 농민들의 경험적으로 형성된 의식과 너무 멀리 있는 것은 아닐까?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우리 농민회가 농민대중과 화학적으로 한 몸이 되는데 결정적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가?

짝사랑을 넘어 우리의 사랑법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연인과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위대한 사랑을 위하여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

농민 속으로?

70년대에 경남 김해의 외곽에 나환자촌이 있었다고 한다. 수백 명의 나환자가 산란계 농사를 지으며 형성된 변두리 집단촌이었다. 계란을 내다 팔고, 닭의 배설물은 길이나, 마당이나 심지어 마루 위에까지 말려서 퇴비로 또 내다파는 것이 그들의 생계수단이었다.

양계장이나 사람이 사는 집이나 별 차이도 없는 이곳에 젊은 목사가 목회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환자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허름한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좀처럼 포교는 진척되지 않았다.

수없는 고민과 기도 속에 목사는 자신의 몸에 나병균을 주사하는 방법을 택한다. 점점 눈썹이 일구러지고 손가락이 마비되면서 자신의 몸에 변화가 일어날 때 드디어 사람들이 교회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서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농민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술자도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든데 농민회가 부담이 된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농민일 뿐이다. 농민의 문제는 나의 문제일 뿐이다. 누구에게 실망하고 절망할 일도 없다. 농민은 농민운동의 대상이 아니라 주인이기 때문이다.

현장!

노동자에게는 노동조합이 있다. 노동조합은 현장에서 임금이나 노동조건 개선들을 해나가며 노동자의 단결을 도모한다. 이러한 일상 활동 속에서 단련된 노동자들은 근본적인 노동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와 제도를 바꾸어야 함을 인식하고 사회문제, 정치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가 아무리 시급해도 노동조합은 현장의 자기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장 없이는 노동조합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농민들에게 현장이란 무엇인가? 단일직종의 노동조합과 달리 농민들은 다종다양한 작목의 농사를 지으며 농민마다 각기 다른 이해와 요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수입개방이나 국가의 농정에 관련된 문제는 공통적인 문제이지만 ‘현장’이라는 지역단위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지역농정에 개입하거나 농협 개혁의 문제정도가 아닐까 한다.

특히 농협 개혁의 문제는 농민의 생존권적 문제이며, 구체적 대중과의 구체적 사업이며, 나아가 농민이 사회정치적으로 주인이 되는데 중요한 과정이다.

오늘날 한국의 농민들은 각종 FTA 등 세계화 속에서 국제적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국가적으로 주요 국가정책에서 배제가 되는 등 외국민의 대접을 받고 있다. 농민 조합원이 주인이라는 농협 속에서는 자신들의 생산물은 저가에 빼앗기고 고리사채에 가까운 금융 시스템 속에서 이중, 삼중의 착취를 당하고 있다.

농협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농민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혁명적으로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고 민주적인 운영을 통하여 상당부분의 농민문제를 개선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농민권력을 형성하는 토대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농협의 개혁과정이 농민회가 농민대중 속에서 강화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아는 만큼 분노한다!

전태일 열사가 청계천의 노동현실을 바꾸고자 만든 조직의 이름이 ‘바보회’다. 엄연히 존재하는 근로기준법과 현실의 부당함을 인식하고도 나서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반성하며 다시는 ‘바보’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은 이름이다.

그러한 인식을 빌리자면 우리 농민이야말로, 아니 우리 농민회야말로 ‘바보’에 다름 아니다. 조합원들의 돈으로 만들어서 조합원들이 뽑아놓은 조합장과 대의원들이 오히려 조합원들의 등골을 뽑아 먹는 현실, 이것을 바로잡을 법도 있고 제도도 있는데 앞장서 나서지 못하는 우리들이야말로 전태일의 절절함을 배우고 지금이라도 나서야 한다.

농협의 회계를 잘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 혼자만 잘나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농협개혁의 문제는 철저히 의식화, 조직화의 문제이다.

사례1>

우리 농협(여주 흥천농협)에서 있었던 일이다. RPC 통합 이후 지역의 농협들은 수매관련 모든 시설을 통합 RPC로 투자한 상태였다. 우리 농협도 시설과 현물 현금을 합하여 17억을 투자하였다.

그런데 지난해 우리 지역에 부족한 벼 건조시설을 지으려는 계획이 대의원 총회에 올라왔다. 물론 낙후된 시설로 수매 때마다 조합원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그 사업의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통합 RPC의 사업이 아니라 우리농협의 돈으로 공사를 해서 통합 RPC에 추가 출자 한다는 것은 부당한 방법임을 지적하는 의견이 나왔다. 대의원총회에서는 사업을 추진하자는 조합장의 의견과 잘못된 방법을 지적하는 대의원들간의 대립 끝에 표결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표결은 거수로 하기로 하였는데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표결 결과 찬성 9, 반대 9, 기권 40이 나온 것이다. ‘아! 조합장 앞에서 거수로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지 못하는구나’

우리는 비밀투표로 표결을 진행할 것을 요구하고 표결을 진행한 결과 찬성 17, 반대31, 기권 10의 결과가 나왔다. 결국 농협의 잘못된 사업방식은 부결되었지만 손을 들지 못하는 대의원들을 보면서 우리가 느낀 당혹감은 많은 교훈이 되었다.

사례2>

마찬가지로 우리 농협에서 있었던 일이다. 위에서 있었던 일 말고도 결산총회 시에는 부실한 자료를 대의원들에게 제출함으로써 이에 대한 시정과 책임의 문제가 대두되어 결산보고 안건이 일주일 연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합장, 전무 등은 반성하기 보다는 대의원협의회가 과도한 문제제기로 원할한 조합운영에 걸림돌이 된다고 불평하였다.

두 번째 결산총회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의원협의회 총회를 갖게 되었다. 총회 전날 조합장은 친한 이사들과 대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총회 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뜻을 표시했고, 결국 대의원협의회 총회는 과반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위에서 살펴본 두 번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대의원들의 의식이 전진하지 않고는 농협의 개혁이 시작도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치 사회의 민주화가 제도가 아니라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성장해야 정착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개방반대 투쟁이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문제이든 농민운동 앞에 가장 먼저 나서게 되는 농민대중 의식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를 넘어서지 않고서 농민운동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설사 부분적인 성공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농민운동이 답보상태에 있는 오늘의 현실은 농민대중의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농협 개혁 투쟁은 그러한 면에서 농민회를 다시 농민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농민들이 가장 아파하는 곳, 소외와 착취와 굴종의 집합터, 농협에서 다시 시작하자.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후회할 시간도 없다

2015년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가 진행되고 나면 지역 농협은 통폐합과 구조 조정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휩싸일 것이다. 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조직적 이익만을 위한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조합원들은 제목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고 더 깊은 굴종을 강요받는 시대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농민운동의 토대를 강화하고, 농민회가 대중 속에서 강화된다는 것은 농민들과 의식적으로 조직적으로 더 밀접히 결합되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후회할 시간도, 자격도 없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