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임 <선구자> 편집주간

<베란다 농사일기⑥>

질긴 장마로 베란다 텃밭은 초토화 되어버렸다. 상추는 모두 녹아내리고 진딧물이 극성이다. 흙에서는 날벌레들이 쉼 없이 나오고 이름도 모를 병충해도 생겨났다. 올 초에 담근 된장, 고추장 항아리에도 곰팡이가 피어난다. 장마 전까지 멀쩡했는데 이 심정을 누가 알랴. 어찌 해볼 도리가 없어 마음을 접었다. 베란다 농사에 한여름 장마는 농한기로 보고, 끈적한 장마를 이겨낸 녀석들만 잘 추스르자고 스스로 다독여 본다.

7월 26일

멀쩡하던 가지가 병이 났다. 잎에 누런 점이 생기더니 초록색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낙엽처럼, 그물처럼 되어버렸다. 응애나 진딧물이 아니라서 일단 누런 점이 생긴 입들은 모두 떼어 냈다. 예쁜 보랏빛 꽃을 여러 개 피웠지만 열매는 열리지 않았다. 붓으로 수정을 해줘야할까?

7월 27일

쥬키니 호박에도 문제가 생겼다. 노란 호박꽃을 피웠던 녀석인데 꽃망울은커녕 잎도 잘 자라지 않는다. 계속 내리는 비에 습한 탓인지 하얀 곰팡이처럼 생긴 것이 잎 위에 얼룩졌다. 서둘러 병든 잎을 따주었지만 없어지지 않고 있다. 친환경미생물제제를 계속 뿌려주고 지켜봐야겠다.

모종으로 키운 상추를 베란다 텃밭에 심었더니 이렇게 되었다. 상추는 한여름엔 어떤 방법으로도 베란다에서는 힘들 것 같다. 널브러져 웃자라던 것이 고개는 간신히 들었지만 무성하게 잎을 세우지는 못한다. 그러려니 하고 있다.

장마에도 끄떡없이 잘 자라는 건 치커리다. 녹아내린 상추를 뽑고 씨앗을 뿌렸더니 하루 만에 싹이 올라왔다. 전에 씨앗으로 뿌린 치커리도 많이 자랐다. 솎아서 먹어야겠다. 처음 모종으로 사서 심은 치커리도 녹아내리지 않고 잎이 무성해졌다. 한여름 장마철에 잎채소는 치커리가 답이다. 치커리 옆에 자줏빛 비트도 키가 많이 자랐다. 살짝 병이 왔나 싶었던 근대도 잎이 점점 크게 자라고 있다. 솎아낸 치커리와 비트 잎으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어볼 생각이다.

7월 29일

질긴 장마에 우리 집 베란다엔 호박만 신이 났다. 뿌리는 멀리(?) 5미터 뒤쪽 베란다 텃밭에 두고 무성한 잎이 거실 베란다 창을 가로지른다. 지지대로 매어준 줄 하나로는 안 되겠다 싶어 베란다 창 쪽에 바짝 붙여 못을 박고 줄을 하나 더 매주었다. 지지대인 줄을 더듬어 덩굴을 감아내는 걸 보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암꽃이 될 아기 꽃도 두어 개 보였지만 더 크지 못하고 떨어졌다. 숫꽃도 아직 작은 봉우리만 보인다. 전에 보이던 것보다 훨씬 큰 아기 꽃이 보여 조만간 해만 잘 나면 꽃을 볼지도 모르겠다.

이 호박넝쿨 사진을 본 초등학교 동창들은 호박이 주렁주렁 열린 줄 안다. “에효~아직은 관상용(?)”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줄을 매달라는 내 성화에 못 이겨 못을 박고 줄을 매준 남편은 호박이 열리면 아파트에 플래카드를 걸어주겠다나?

7월 30일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어쩔 수 없이 베란다 창문을 닫게 된다. 습한데다 바람이 통하지 않으니 사람도 죽을 맛이다. 그러면 여지없이 진딧물이 극성이다.

특히 고추의 가장 여린 순에 진딧물이 귀신같이 붙어있다. 호박 뿌리근처에 무성하게 올라온 호박잎은 진딧물의 온상이다. 호박잎 앞뒤로 진딧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약을 뿌리다 지쳐 끊어냈다. 열리지 않는 베란다 고정창 바로 밑에 호박을 심어 바람이 아무래도 덜 든다. 내년엔 절대 그곳에 심지 말아야겠다.

그래도 친환경미생물제제인 ‘뚝’을 만족스럽게 잘 쓰고 있다. 고추가 무럭무럭 잘 자라준 데는 이 ‘뚝’이 한몫했다. 고추를 심은 화분이 아무래도 작은지 고춧잎이 무성해지고 고추가 여러 개 달리면서는 한낮에 고춧잎이 축 쳐지기도 한다. 물이 부족해서 그렇다. 내년엔 넉넉한 화분에 심어볼 생각이다.

녹아내린 잎채소들 때문에 텃밭상자가 줄었다.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빈 상자들이 한쪽에 모여 있다. 긴 장마 끝에 무더위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햇볕이 많이 필요한 호박이나 가지, 고추에겐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잘 익어가던 된장, 고추장 항아리에 핀 곰팡이도 햇볕에 바짝 말려야겠다. 속이 타서 친정엄마께 여쭈었더니 곰팡이만 살짝 걷어내고 그냥 두란다. 햇볕에 표면을 바짝 말리면 자연히 곰팡이는 맥을 못 춘다고. 식초를 묻힌 숟가락으로 곰팡이를 걷어내고 아쉽게도 도망가는 햇살을 쫓아 항아리를 해바라기 시켰다. 가능한 햇살을 가득 받으려고 옆으로 누여서.

장마 끝에 올 무더위를 걱정하는 소심한 친구들에게 한 친구가 한 마디 날렸다.
“비면 비, 무더위면 무더위 올 테면 와봐라!”
질긴 장마도 이겨낸 채소들이 무더위를 무서워하랴!
한번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