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혁기 / 글쓴이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후 금융, 교육, 언론, 출판분야에 종사했으며 현재는 도시농업, 도농교류, 귀농귀촌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가 지난 7월 하순 무렵 옥수수를 몇 자루 보내왔다. 택배를 받던 날 내가 사는 곳에도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마전선이 충청 북부와 경기 북부 사이에 정체하며 비를 쏟아 붓고 있었다. 그 중 비가 안 오는 틈새 날을 노려 수확했으려니 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비가 온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을테니 아마 비옷을 입고 작업했을 지도 모르겠다. 최근 수 년 간을 보면 날씨가 매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2년 전 이맘때가 생각난다. 6월 중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8월까지 이어졌다. 6월에는 태풍 ‘메아리(MEARI)’가, 7월 말에는 태풍 ‘무이파(MUIFA)’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걷힐 줄 모르는 가운데 칠월칠석이니 입추가 소리 없이 지나갔고 오르락내리락 비를 뿌려 연이어 평년 강우량을 갈아치웠다. 지지난해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다. 잦은 비와 흐린 날이 계속돼 벼가 영글지 못했고 가을농사 일정을 맞출 수 없었다. 콩은 덤불처럼 위로 자라기만 했다. 배추, 고추 등 채소작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 작두콩 꽃

올해 날씨도 종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특징이라면 중부지역은 장마철 폭우로, 남쪽지역은 반대로 폭염에 시달리고 비를 기다려야할 상황을 맞았다. 비가 남쪽부터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장마전선이 마치 대치하는 군사들처럼 중부지역에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그에 따라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이 벌어졌다. 일조량이 부족해 재배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때를 맞추기도 어려워 진 것이다.

새로운 환경이 한반도에 펼쳐지고 있는 것인가. 이미 지구는 이산화탄소 등 대기권의 변화가 몰고 온 기후변화로 해수위 상승, 해일, 사막화,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농사환경은 안정되고 예측가능 해야 하는데, 앞을 모를 정도로 갑자기 환경이 변화하면 전통적으로 지어오던 농사라도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농사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물, 빛, 기온인데 이들이 변화되면 농사도 따라 변화될 수밖에 없다. 여름날이 이래서는 햇빛 부족으로 수확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수확이 줄면 그나마 쥐꼬리 같은 농가 수입도 줄어든다. 농사가 고생스럽지만 심고 거두어들이는 재미 나마 있어야 지탱되는데….

이제 여름도 뒤끝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다. 8월 초순에 들어오면 바람결이 달라지고 기세등등하던 더위도 한풀한풀 꺽여가기 시작한다. 8월은 여름 넘어 가을로 가는 징검다리 달이다. 7월의 소서(小暑), 대서(大暑)도 8월초 성큼 다가선 입추(立秋, 8월 7일)에 후달짝 놀랜다.

“아니 벌써 내가 물러날 때가 된 건가? 가을이 왜 벌써 왔어?”
“우린 이미 소서 때부터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자네 갈 길이나 잃지 말고 잘 돌아 가게나”
“무슨 말이여? 8월이 아직 여러 날 남았지 않은가. 23일 까지는 버텨 보고 정 안되면 그때나…”

이들이 23일을 들먹이는 것은 더위가 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처서(處暑, 8월 23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처서가 되면 여름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서늘해지면서 만물이 성숙하는 때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도 덥다고 발로 차내던 홑이불을 턱밑으로 당겨 덮을 때기도 하고, 한 여름 귀찮게 쏘아대던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 때다.

▲ 참깨꽃

그래서 8월은 늦더위와 초가을이 서로 교차하는 때니 좋은 자연학습장이 되기도 한다. 이 시기 가장 신나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초중등 학생들. 7월 중하순에 여름 방학에 들어가 다시 학교 문 열리는 8월 하순까지가 바로 그 시기. 물놀이, 시골가기, 매미잡고 잠자리 잡고 삼촌과 함께 낚시하고 투망 던지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방에 붙어있는 날이 많으니 어른들에게는 부담도 크다. 함께 놀이도 가야하고 체험학습도 보내야하고. 개학해 친구들 만나면 서로 “뭐 했네, 어디 갔다 왔네”들 할 텐데. 기죽일 수는 없고.

▲ 조

농사로 보면 8월은 한 숨 돌리는 철이다. 특히 과채, 엽채류를 비롯해 봄, 여름에 심은 작물을 수확하는 때다. 오이, 가지, 토마토, 옥수수, 호박, 풋고추, 열무, 수박, 참외 등 먹을 게 지천에 널리는 철이다. 논농사 역시 한 여름 햇빛을 받으며 벼꽃이 피며 이삭이 나오는 때여서 봄부터 바쁘게 진행되던 일이 한 템포 늦춰지며 허리를 펴고 구름 이는 하늘을 바라볼 때다. 흰 뭉게구름 퍼지는 하늘에 잠자리 떼가 날고 맴맴 매미 소리가 공중에 퍼져간다.

그래서 8월에는 입추, 말복, 처서 말고도 지금은 그 의미와 풍습이 많이 퇴락하고 말았지만 재미있는 날이 있다. 백중(百中)이다. 날짜로는 음력 7월 15일로 8월 한가위 한 달 전에 해당하는 ‘7월 보름’이다. 올해는 8월 21일이다. 백중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얘기가 적지 않다.

먼저 어원과 관련해서는 백종(百種)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부르는데 백종(百種)은 여러 가지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여 유래됐다고 하고, 망혼일(亡魂日)은 망친(亡親)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음식·과일을 차려 놓고 천신(薦新)을 드린 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백중 무렵이면 농사일이 여름의 힘든 일로부터 잠시 숨을 돌리는 여유를 찾는 때이고 가을겆이를 앞둔 때이며 이른 햇곡식과 과일이 나오는 때다. 한숨 돌리며 잠시 몸을 추스를 시기인 것이다. 손을 떠나지 않던 호미를 잠시라도 놓는다는 ‘호미씻이’ 날이다.

▲ 노점

그래서 이 날에는 마을마다 벌이는 여러 가지 풍속이 전해져 내려온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장터나 강가 모래밭에 야외무대를 가설해 놀이, 노래잔치를 벌이는 등 행사를 챙기는 지자체들이 적지 않다. 농경사회 시절에는 마을에 풍악이 울리고 씨름판이 벌어지는 등 다채로운 놀이가 함께했다. 산업구조가 변하고 전통시골문화가 퇴락하면서 퇴색해버린 대표적인 전통 전래풍습들이다.

다음은 한 자료(출처=www.sesistory.pe.kr)에서 인용한 백중의 풍습이다.

각 가정에서는 익은 과일을 따서 사당에 천신(薦新)을 올렸으며, 궁중에서는 종묘에 이른 벼를 베어 천신을 올리기도 했다. 농가에서는 백중날 머슴들과 일꾼들에게 돈과 휴가를 주어 즐겁게 놀도록 했다. 이날이 되면 머슴들과 일꾼들은 특별히 장만한 아침상과 새 옷 및 돈을 받는데 이것을 ‘백중돈 탄다’라고 했다. 백중돈을 탄 이들은 장터에 나가 물건을 사거나 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이때 서는 장을 특별히 ‘백중장’이라 하여 풍장이 울리고 씨름 등을 비롯한 갖가지 흥미있는 오락과 구경거리가 있어서, 농사에 시달렸던 머슴이나 일꾼들은 마냥 즐길 수 있는 날이다.

지역에 따라 이날 농신제(農神祭)와 더불어 집단놀이가 행해지는데 이를 ‘백중놀이’라고 한다. 일종의 마을잔치다. 이날은 그해에 농사가 가장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소에 태워 마을을 돌며 하루를 즐긴다. 마을 사람들은 장원한 집의 머슴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도롱이를 입히고 머리에 삿갓을 씌워 우습게 꾸며, 지게나 사다리에 태우거나 아니면 황소 등에 태워 집집마다 돌아다닌다. 이날을 ‘머슴날’이라고 하기도 한다.

마을 어른들은 머슴이 노총각이나 홀아비면 마땅한 처녀나 과부를 골라 장가를 들여 주고 살림도 장만 해 주는데, 옛말에 ‘백중날 머슴 장가간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얼마전까지 농촌마을에 이어지던 전통민속놀이가 갈수록 사라진다.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것이 어디 백중뿐이랴. 그것은 놀이와 행사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름을 지나 가을로 넘어가는 8월의 자연과 산물은 아직 풍성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