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임 <선구자> 편집주간

베란다 농부에겐 정말 끔찍한 여름이었다. 장장 50일에 가까운 장마는 베란다 텃밭을 초토화시켰다. 된장, 고추장 항아리엔 하얀 곰팡이 꽃이 피었다. 진딧물은 제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잎채소 대부분이 녹아내렸고 자고 나면 생기는 진딧물과 전쟁을 벌어야했다.

하지만 오는 가을을 막을 수는 없는 법. 모기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자 더위도 습기도 푹 고꾸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베란다는 내 세상이다.

9월 10일

여름 내내 보랏빛 꽃만 피운 채 화초인양 잎만 무성하던 가지에 드디어 열매가 달렸다. 처음엔 썩지 않는 흙인 ‘리치소일’을 커피봉투에 담아 키웠는데 봉투가 너무 작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날을 잡아 큰 화분에 옮겨 심었다. 흙도 일반 텃밭용 흙으로 바꿔 주었다. 그랬더니 키가 쑥 자라고 잎이 커지면서 열매를 매달았다. 그간 뿌리가 너무 작은 공간에 갇혀있었나 보다. 가지가 모두 다섯 포기인데 모든 포기에서는 아기 가지가 매달렸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집 베란다에서는 한여름보다는 더위가 꺾인 뒤에 가지가 더 잘 자란다.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 지지대가 필요한데 마땅한 것도 없고 작은 화분은 지지대를 꽂아도 힘을 못 받아 천장에 줄로 매달아 지지대를 대신했다. 그건 고추도 마찬가지다. 원래 거실 베란다를 가로 지르는 저 줄은 호박을 위한 것이었는데 진딧물이 잔뜩 붙은 호박잎을 잘라주다 그만 호박넝쿨을 실수로 잘라버렸다. 잘 자라던 호박은 주인을 잘못 만나 비명횡사 했다. 애정이 넘치는 것도 화가 되는가 보다.

베란다 텃밭에 가장 효자 녀석은 고추다. 더위가 물러나자 끝물 고추가 다닥다닥 열린다. 마치 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처럼 다투어서 말이다. 한참 더울 때 열린 고추는 매달린 채로 익어 빨갛다. 어떤 녀석은 자연스럽게 태양초가 되어 가고 있다. 화분이 너무 작아 뿌리가 겉으로 드러났다. 물을 줄 때마다 패어 흙을 북돋아 주는 데도 올라온 뿌리를 보면 안쓰럽다. 무성한 가지와 잎, 열매를 매달고 있으려니 하루만 물을 걸러도 금방 잎이 시든다. 내년엔 꼭 큰 화분에 심어야겠다. 열매를 맺은 가지와 고추는 액체로 된 웃거름을 주었다.

김장에 쓰려고 쪽파를 심었다. 구근 형태로 되어 있어 심기만 하면 잘 나온다. 새파랗게 올라온 쪽파 싹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다 푸근해진다. 시금치와 로메인, 청경채도 날이 선선해지자마자 얼른 씨앗을 뿌렸다. 시금치는 한참 싹이 올라와 잘 자랄 때 화분을 엎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눈물을 삼키며 다시 뿌렸다. 무성한 시금치가 기다려진다.

  두 번이나 된장국을 끓여 먹었는데도 근대는 잘 자란다. 잊고 있으면 넓적한 잎이 자라 있다. 늦봄에 뿌린 쑥갓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포트에서 옮겨 심었다. 치커리도 솎아내고 남은 녀석들이 잘 자라서 잎이 무성해졌다. 씨앗에서 모종으로 키운 것 중 긴 장마를 견디고 용케도 살아남은 대단한 녀석들이다.

   비트와 들깨는 늦봄에 모종으로 심은 것인데 비트는 있는 듯 없는 듯 더디 자란다. 들깨는 해만 잘 들면 잘 자란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김장 배추를 심어보라는 분들이 있었지만 땅(?)이 모자랐다. 화분도 없고. 하나 남은 텃밭 상자는 깊이가 깊어 뿌리채소로 적당한 것을 심어야 해서 무를 심었다. 이제 막 본 잎이 올라왔다. 딱 가지만큼만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가을 겨울을 지내보면 우리집 베란다 환경에서 잘 자라는 채소들이 정해지리라. 중간에 내 실수로 실패했지만 잘 자라주었던 호박과 가지, 고추, 치커리, 근대, 깻잎은 일단 합격이다. 토란은 확실히 힘들다. 열무와 얼갈이는 생각과는 다르게 힘들었는데 내년 이른 봄에 씨앗을 뿌려보면 알 것 같다. 씨앗을 뿌리는 시기를 잘 맞추지 못해 실패한 것도 있으니 일 년을 한 바퀴 돌아보면 욕심내지 않고 잘 키울 수 있는 채소들이 눈에 보일 것 같다. 아직 부추씨앗을 뿌리지 못했다. 이른 봄에 뿌리라고 해서 봄을 기다리느라. 당근과 근대 씨앗도 봉투에 그대로 있다. 고추와 가지로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 베란다 텃밭이 어떻게 변신할지 상상만으로 며칠은 즐거울 것 같다.